Post #58 “생명을 중히 여기는 자” (강찬영)


[삼상 26:24]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다윗은 “십” 황무지에서 잠자고 있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맞는다. 다윗의 심복인 아비새는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노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꽃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나이다 라고 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위의 24절의 고백을 한 것이다.

그는 왕의 생명을 귀중히 여긴 자이다. 그런데 그 왕은 어떤 사람이었나? 사울 왕은 그의 원수였으며 대적이었다. 하나님이 버린 사람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마땅히 죽여야 했던 자였다. 그래서 우리는 아비새의 입장을 이해 할 수 있고 동감 한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원수인 사울왕의 목숨을 중히 여긴 것이다.

그랬을 때 그는 하나님께 청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가 된다. 그가 원수의 목숨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에서 그를 구하여 내실 것을 믿음으로 선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 삶 가운데 아직도 사울과 같은 악인들이 있는가? 어쩌면 그것은 아직도 내가 생명을 중히 여기는 비결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 일 수 있다. 하나님은 그 “악인”들을 통해 생명을 귀중히 여김을 배우라 하시는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은 나의 생명을 중히 여기시는 구원의 일들을 행하실 것을 약속 하신 것이다.

지금 코비드 사태 가운데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건강, 재정, 자녀들 등 을 포함한 나의 생명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관심을 내 삶에 있는 어떤 왕, 악인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생명을 중히 여기는 자로 변화 될 것을 말씀 하신다.

최근에 레바논의 문제와 위기를 대형 화재와 폭발을 통해 보여 주셨다. 우리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도와줄 이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동의 유일한 기독교 국가인 그들을 중히 여기라신다. 왜냐하면 그들을 하나님이 중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왕이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신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을 기다리시며 그가 돌이킬 것을 기다리신 하나님 이시다. 다윗으로 하여금 그렇게 오랜 세월을 도망 다니게 하신 이유가 있다면 다윗을 연단함을 위한 것 뿐 아니라 사울로 하여금 그런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셨던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이 중히 여기는 생명을 중히 여기는 우리가 될 것을 하나님이 구하신다.

레바논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이 marionite church에 속해 있다. Marionite 교회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와 많이 다르다. 2019년에 레바논 선교여행을 가서 느낀 것이지만 우리의 교회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은 이번의 재앙을 통해 그리고 그동안의 정치 부패로 인한 폭동 시위 등의 문제들을 드러나게 하셔서 레바논과 그 땅의 백성들의 생명을 중히 여기라고 하시는 세미한 성령의 소리라 여겨 진다. 레바논을 성경에 나오는 백향목과 같이 아름다운 향기를 피우는 나무로 거듭나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엿보게 하신다.

악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하물며 기독교 나라인 레바논과 그 백성들을 중히 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코비드사태가 나로 하여금 그런 중히 여겨야 할 생명들에 대해 무관심 하게 하는 핑계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쫓겨 다니던 광야의 고난 가운데 자기 생명을 간수 하는데 조차 급급했던 다윗에게서 원수의 생명을 중히 여기기를 기대하셨다면 지금 코비드 가운데 어렵고 힘든 우리이지만 하나님은 원수나, 고난 가운데 있는 레바논 땅의 백성들, 과부와 객과 고아…그래서 긍국적으로 모든 생명을 중히 여기기를 기대 하신다.

최근에 중동에서 코로나 환자들을 돌보는 가운데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헌금을 모아 보내게 되었다. 금액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우리의 헌금이 생명을 살리는데 기여하게 된 일이었다. 그 땅의 무슬림들의 생명을 중히 여기는 일이었다. 당장은 은행통장에서 우리의 돈이 빠져 나갔지만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이 각 자에게 주신 은혜와 감격과 사랑은 우리가 드린 헌금 액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으로 채워지는 일이었다.

이제 레바논 땅을 위해 우리의 마음을 일으킬 때이다. 이것은 우리를 약하게 하고 가난하게 하여 우리로 살기 어렵게 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나의 생명을 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을 중히 여기는 가운데 우리의 것을 나누어 줄 때 당장은 약함과 가난함 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을 통해 우리를 강하고 부요한 자들로 누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길이다. 생명을 중히 여기는 자라면 당당하게 하나님께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을 오늘의 말씀에서 보여주신다.레바논이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주위에 우리가 중히 여겨야 할 생명들을 두실 것이다. 왜? 우리를 강하고 부요케 하시는…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그 무엇보다 중하게 만드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 때문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