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 #57 “구제의 복”


[신 15:7-11] "7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10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구제에 대한 구체적인 지혜를 말씀하신다.

먼저는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이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당연히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알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시사하신다. 그런데 나는 그런 가난한 사람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들이 먼저 나에게 찾아와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먼저 우리 가운데 가난한 자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신다. 그래서 11절에서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하신 것이다. 나의 아는 것은 고작해야 내가 다니는 길거리에 서서 구걸하는 사람들 정도이다. 그런데 내 주위에는 내가 알지 못하지만 알 필요가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알기 위해 눈을 뜨고 보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하신다. 내 손을 펴서 주는 것과 마음을 강퍅케 하여 손을 움켜쥐는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손을 움켜쥐고자 하는 경향이 있음을 깨닫게 하셨다. 아까운 마음이 들었고 그들이 내 것을 받아야 할 권리나 이유가 없다거나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생각 가운데 나의 손을 움켜쥠를 정당화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형제”라고 하신다. 그들을 남이 아니라 나의 형제로 하나님은 여기신다. 그런데 나는 그들을 스스로 판단하여 나와는 상관없는 남으로, 가치 없는 사람으로 보아온 것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가 무슨 이유로 가난하여졌는지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신다. 다만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치라고 명하신다 [11절].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는 재정적인 필요가 있는 사람뿐 아니라 어떤 영역에서든지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즉 가난한 자는 곤란하고 필요가 있는 자인데 그들을 향해 열린 손을 가진 자로 살라고 하시는 것이다.

간혹 내가 주로 다니는 길에는 동일한 사람이 일정한 곳에서 구걸하고 있다.그래서 어떤 때는 저 사람은 전문적인 걸인이구나 하는 생각 가운데 주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동일한 가난한 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언제든지 우리 땅에 있는 가난한 자”를 연상시키는 도구일 뿐이라고 하신다. 매번 볼 때마다 주고자 하는 열린 손을 통해 내 주위에 있는 가난한 형제들을 기억하라 하신다. 이전에 애굽에서 종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그 펴신 손으로 구원해주신 사실을 기억하는 가운데 나도 열린 손을 가진 자가 되기를 다짐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주지 않는가? 가난한 자를 볼 때 마음이 강퍅해지기 때문이다 [7절].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그래서 “반드시”라는 말씀을 2번이나 반복하시며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는 것은 자신의 권리에 달린 결정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이었는데 마음이 강퍅해진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수긍하지도 깨닫지도 못했던 것이다.

열린 손을 가진 자로 살라신다. 내가 가진 것을 언제나 누구에게라도 주는 자이다. 오직 한 가지 조건은 그 사람이 궁핍하고 곤란한 자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우리의 전 재산을 다 팔아 주라는 말씀이 아닐 것이다. 내가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에 대한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주어야 할 가난한 사람을 보이시고 어떻게 얼마를 주어야 할지를 알게 하실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원치 않으신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자인지 아닌 지일 뿐이다.

그래서 “삼가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경고하신다. 잘못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생각이라고 하신다. 즉 주지 않고 움켜쥔 손을 가지는 자는 악한 생각을 가진 자라 부르신다. 악념 가운데 우리는 “악한 눈”을 가지게 되어 가난한 사람에 대해 어떻게 하면 주지 않을 수 있는 핑곗거리를 찾는 자가 되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보지 않고자 눈을 감은 자이다. 저 사람은 술이나 마약을 사 먹을 터인데…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자인데..왜 건강한 사람이 구걸하고 있지? 옷은 너무 잘 입었어..내가 어떻게 해서 번 돈인데…나에게 좋지 않은 일을 한 사람인데…이런 생각들로 우리는 주지 못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마음을 삼가라고 하신다.

주는 자에게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약속하신다. 즉 내게 주신 것으로 올바른 구제를 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더 부어주신다. 그래서 더 많은 구제를 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하실 것이다. 내게 주신 복을 주고 나눌 때 그 일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 나에게 더 많은 복을 내게 주시게끔 하는 일인 반면, 내게 주신 복을 움켜쥐고 있다면 그 복은 내 손안에서 소모되어 버릴 것이다. 복을 주신 이유는 그 복이 나누어져서 열매를 30, 60, 100배를 맺기 위함이다. 그 복의 씨앗을 내가 먹어버릴 때는 없어지고 말 것이지만 그의 뜻대로 구제하고 나누어 줄 때 배가되는, multiply 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

요사이 장막장이 사역은 중동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모금 운동을 하고 있다. 코비드 19로 인해 의료시설도 없고 도울 사람들이 없어 속수 무책하게 죽어가는 그 땅의 사람들을 위해 의료진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직접 의사, 간호사가 되어 목숨을 각오하고 코로나 환자들을 돕고 있다.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는 고민 가운데 뛰어든 선교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산소호흡기 한 대가 여러 명을 살리고, 그 일을 통해 자원봉사자들이 일어나고, 또 여러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일들이 무슬림들 안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적은 헌금이 선교사들의 목숨을 각오한 섬김과 합력하여 큰일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하나님을 높이지 않을 수 없다. 그곳에 있는 중동의 선교사들에게는 코비드 19가 절대로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증거할,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는 기회가 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큰 용사들을 일으키신 것이다. 이곳에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코비드 19 가운데 있는 우리에 대해 재앙이 아닌 평안을 생각하고 계신다. 장래에 소망을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하며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